목록Sample (22)
Fallin
자고 일어났을 때 눈꼬리 밑에 가는 실선이 패여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잠결에 손톱으로 상처라도 만들었나 하였다. 그러나 선을 손으로 꾹 눌러보고, 피부를 당겨보기를 몇 번.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주름이었다. 흘러간 세월의 흔적이다."기가 차는군."이른 아침 거울을 바라보며 그는 혼잣말을 했고, 곧이어 생각했다.죽어야 한다. 나 자신의 의지로, 이 생을 끝내야 했다. "안녕하세요, 뮐러 선생님."그는 어깨와 모자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낡은 나무문을 열고 들어선다. 평범한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훌쩍 큰 장신의 손님을 알아본 약사가 아는 척을 먼저 해왔다."어쩐 일로 오셨어요?""저택에 쥐가 끓는군.""쥐요?"그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인간과 깊게 이야기를 하여 얽히는 것을..
고귀한 분께서 저 높은 가지에서 이 땅으로 임하여 다시금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 쓰셨군요.어이 이곳에 계십니까? 그 말을 누가 했었던가. 헤르만은 목소리를 내었던 인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50년이 넘은 일이었다. 중간계에 발을 들여 정보를 모으고 다니며 찢었던 제 가죽의 수가 벌써 두 손을 넘어갔다. 인간이 섣부른 의심을 할 때, 뿌리의 것들과 엮을 때마다 새로이 이름과 나이와 지리멸렬한 신상을 만들어내니 이젠 하나하나 추억하는 것도 지겨웠다.그럼에도 핏빛의 눈을 감고 그때를 회고하면, 그것은 그가 두 발로 기는 인간의 땅으로 현계하여 인간의 거죽을 흉내 내고 다니기 시작하였을 때. 아마도 열에서 스물 사이, 적당히 푸릇해지기 시작하는 나이대로 구성한 육체를 보고 어느 노파가 ..
비가 온다. 카쳐 헤어우드는 내리는 비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대수롭지 않게 쓸어 넘긴다. 피에 젖은 가죽 장갑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는 손길에 흰 빛의 피부를 따라 반투명한 붉은빛이 들었다가 내리는 빗방울에 씻겨 사라진다. 쏟아지는 빗방울 덕분에 깊은 청색의 머리카락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던 검붉은 핏자국이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추적 방향은 어떻습니까?” 카쳐의 부관은 그의 질문에 품에서 지도를 꺼내 확인하고, 나침반을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거린다. 방향은 여전히 북동쪽, 직선을 그리며 올곧게 달려온 그들의 부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적군의 뒤를 쫓고 있었다. “문제없습니다. 헤어우드 경.”“그럼 5분간 쉬었다가 마저 쫓도록 할까요. 괜찮습니까?”“그렇게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철수하는 ..
오늘, 남편을 죽였다.아니, 어쩌면 어제일지도 모른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직 하나의 사실만이 나의 머릿속을 간지럽혔다. 늘어진 머리카락에 엉겨 붙은 피 때문에 평소보다 더 머리가 무겁게 느껴지는 와중에, 나는 하나만을 생각했다. 내 아이는 어디에 있지? £££ 호조 마사유키, 호조 그룹의 전 대표가 죽었다. 재벌 3세로 태어나 그린 것처럼 비리 재벌총수로 살아오며 때때로 그 동향만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죽음이었다. 아마 그도 생전에 그러한 죽음을 맞이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을 것이다. 그와 전 부인의 사이에서 난 자식들보다 어린, 40살 연하의 젊은 아내의 손에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해봤을 리가.신문의 사회면이나 경제면에서 보던 얼굴을 처참하게 난도질 된 시신..
ㅈ님의 글을 읽고 가장 먼저 느낀 것은, 현실에 있을 법한 소재를 적절하게 골라내어 글감을 고르셨다는 생각이었습니다. ( ), ( ), ( ), ( ). 모든 것이 무척 흥미로운 소재라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즐겁게 읽을 수 있었어요. ~중략~ 때문에 세 인물을 그려내는 방식에서 명확한 개성을 심어주신 부분이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에 대한 강한 혐오를 가진 부모님 아래에서 자라나 ***을 두려워하고, **하는 A는 막연하게라도 A와의 미래를 꿈꾸던 B와 캐릭터의 개성이 뚜렷하게 구분됩니다. 또한 ****에 대해서 적대감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B와, 모든 ****이 나쁜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하는 C 또한 개성이 뚜렷하게 구분된다는 점이 캐릭터를 묘사하는 것에 있어 ㅈ님이 무척 신경을 쓰셨다는 점이..
본격적으로 타임라인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특이하게 부모님 배경 설정부터 설명을 해놓으셨구나,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출생 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연히 만난 ##와 사랑에 빠져 가정을 이루다니, 멋지다! 라고 생각했는데 ‘(본문 인용)~’라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서술해놓으신 대로 이 결혼이 ‘(본문 인용)’이기 때문에 캐릭터의 출생 이전부터 약간의 그늘을 서술해놓으신 것 같았어요. ~중략~ 사실 캐릭터의 아버지가 자신의 목표-## 생활을 계속하는 것을 선택한 부분에는 충분한 개연성이 있습니다. 그가 캐릭터의 어머니에게 청혼을 했을 때 명시됐던 바가 있죠. 우연히 만난 사람과 만남을 가졌고, (본문 인용)고 했으니까요. 미혼의 아버지에게는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된 사랑이 낭만을 추구하는..
언젠가 들은 말 중에 인상 깊었던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태어난 이후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천천히 죽어가는 것이다,’라는 말이었네요. A님의 작품과 첨부해주신 자료를 읽고 이 말이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에 신청서를 읽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해당 장르는 많이 접해본 분야가 아닌데 제대로 된 감상을 남길 수 있을까? 였습니다. 하지만 A님의 글을 읽으면서 처음에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글에 쉽게 빠져들 수 있어서 안심했습니다. 생소하게 읽힐 수 있는 장르를 타인에게 쉽게 이해시키고 몰입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무척이나 멋지게 이를 해내셔서 좋았습니다. 감상을 위해서 두 번째, 세 번째 읽었을 때는 앞서 주신 서사 정리를 되도록 잊은 채로 읽고자 노..
라스티카가 웃고 있었다. 클로에는 라스티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것이 꿈이라는 걸 깨달았다. "홍차를 한 잔 더 마실래?" 라스티카는 정면을 보며 웃고 있었다. 클로에는 라스티카의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라스티카가 보고 있는 정면에는 면사포를 쓴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것을 여자라고 부를 수 있다면, 아무튼 신부라고 할 수는 있었겠지만…. 머리가 없는 해골이 드레스를 입고 라스티카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클로에의 스승은 그런 신부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홍차를 한 잔 더 마시지 않겠냐고, 각설탕을 넣어주는 쪽이 좋으냐고 묻는 다정한 목소리에 클로에는 질식할 것 같았다. "저기, 라스티카." "오늘의 잼은 유달리 달콤하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먹는 것이라 그럴까?" "있잖아, 라스티카……." 클로에가 ..
시야를 가릴 정도로 가득한 담배 연기가 표정을 가려준다고 지껄이는 것은 도박꾼 특유의 만용이다. 시가를 문다고 해서 특별하게 승률이 올라가던 적이 있던가? 머릿속으로 근 5년간의 포커 전적을 헤아리던 무르 하트는 들고 있던 패를 내려놓았다. 비명소리가 섞인다고 해도 알아 듣기 어려웠을 술집에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백 스트레이트 플러시.” 지역산 담배 특유의 독한 연기들이 뭉개뭉개 피어오르는 가운데 흰 장갑이 카드 패 위에서 점잖게, 그러나 겸손하지 않게 그의 패를 내보이고 있었다. 정적은 상스러운 욕설이 섞인 대화와 함께 깨지고, 맥주 거품이 넘쳐흐르는 잔을 깨트릴 것처럼 내려놓는 소리들이 연이어 울렸다. “말도 안 돼!” “벌써 몇 번째 플러시지?” “이 자식, 사기꾼 아니야!?” 수십 년 전에도,..
“리치.” “깡.” 연기가 자욱한 지하에 낭랑한 목소리가 울린다. 서로의 얼굴도 알아볼 수 없이 연기가 자욱한 지하에서 패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린다. 몇 번이고 부딪히는 맑은 소리에서 리치와 깡을 연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멈추게 한 것은 유일하게 연기를 입에 물지 않은 여자다. “ … 아,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었나? 린샨카이호, 멘젠쯔모.” 패가 테이블에 부딪히고, 자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난다. 신음이 지옥의 구렁텅이로부터 올라와 한탄을 담아 울린다. 지금껏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된 판에서 한 번도 나지 않은 적이 없는 학자가 다시금 승기를 잡았다. 내가 이겼군.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던지는 흰 장갑에 웃음이 서려 있었다. 테이블 위에 올라있던 황금 조각에 닿는 손가락의 바로 옆으로 녹슨 단도..